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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극평론> 김천에서 피어난 ‘할미꽃 전설’

데일리김천tv 기자 dailylf@naver.com 입력 2023/04/21 18:38 수정 2023.04.21 18:42
이선형(김천대 교수, 연극평론가)

연극은 도시의 발달과 밀접하다. 인구가 많을수록 연극은 융성하다. 과거에 연극쟁이들이 장돌뱅이처럼 장날을 찾아다녔던 것도 사람이 많은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방은 인구가 줄어들면서 여러 분야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연극 역시 그렇다. 이처럼 지방연극은 우울한 면이 많지만, 김천만은 예외다. 김천과 연극은 특별하다. 오래전에 생겨난 김천 유일의 극단 삼산이수가 있기 때문이고, 매년 성황리에 개최되는 김천국제가족연극제가 있기 때문이다. 지역축제로 자리매김한 연극제 덕택에 아이부터 어른까지 연극이 낯설지 않다. 극단과 연극제가 서로 주고받으며 시너지 효과를 내고, 김천시민은 알게 모르게 연극과 접하면서 연극의 매력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연극에 대한 그 친밀함이 이번 삼산이수의 공연 <할미꽃 전설>에 상당한 관객이 입장한 결과로 나타났다.

연극은 아날로그 예술이다. 일단 인쇄된 희곡이 있어야 하고, 배우들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연습해야 한다. 공연은 실시간 몸들의 현전으로 이루어지며 관객은 무대를 오감으로 지각한다. AI 그리고 쳇GPT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의 예술은 케케묵은 느낌이지만, 잘 익은 곡주처럼 매력이 있다. 코로나19로 정상적인 만남이 어려웠을 때 사람들은 코로나 블루에 시달렸다. 사람은 만나야 하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져야 건강하다. 연극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삼산이수 주최로 김천시문화회관에서 이틀간 경북연극제 참가작 <할미꽃 전설>(국민성 작, 강정식 연출, 23.04-14, 15)이 공연되었다. 2013년 한국희곡작가협회 희곡상 수상, 2017년 대한민국연극제 서울대회 희곡상 수상 경력을 지닌 극작가의 작품을 지방극단에서 초연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한쪽에 간단한 신당이 꾸며져 있고 무당 신자가 서 있다. 첫 장면에서부터 <할미꽃 전설>은 무속의 분위기를 깔고 있다. 민간 신앙인 무속은 이승과 저승,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준다. 무속은 죽은 자의 혼령이 저승에 무사히 이르도록 하고, 산 자는 죄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점에서 살풀이의 의미가 크다. 아마도 굿판이 벌어지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은 인물이 치유되는 것을 보면서 함께 치유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연극의 원리다. 공연장에 들어오기 전 일과 만남에 분주했던 사람이 공연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일반인에서 관객으로 변신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가장 커다란 의미는 관객은 자발적으로 의심을 멈춘다는 것이다. 무대는 간단한 장치, 소품, 조명, 그리고 라이브 음악으로 꾸며져 있지만, 관객은 무대를 거짓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곳이 신당이라면 신당으로 믿고, 천안, 신촌, 강남, 수원이라고 하면 그렇다고 인정한다. 인물 중 할매와 애기씨는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혼령이지만, 혼령의 존재에 대해 아무도 시비 걸지 않는다. 과연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이렇듯 세상에 대해 통째로 의심을 버리고 전적인 신뢰를 보낸 적이 있는가. 붉은 천을 꺼내며 피가 난다고 하면 그렇다고 믿고, 갑자기 조명이 밝아지며 더운 여름이라고 하면 관객도 더워진다. 인물들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감정이 출렁인다. 세 아들을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키워냈건만 구박받는 할매를 보면 왠지 자기 일 같아 마음이 답답해진다. 이름도 없이 세상 공기도 마셔보지 못한 채 죽어야 했던 애기씨의 사연을 들으면 울컥해진다. 신자 역시 무용수를 꿈꾸었지만 애기씨가 몸주가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무당의 길로 들어서야 했던 상처가 있다. 그리고 오늘 정확히 10년이 되는 날, 애기씨는 신자를 놔 주고 저승으로 떠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신자는 그때까지 몰랐던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애기씨는 다름 아닌 자신의 태중 아기였던 것이다. 극의 대단원에 이르면 죄책감에 시달리던 신자는 애기씨와 마지막 굿판을 벌인다. 신당에 촛불이 켜지고 아련한 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혼령이 원한을 풀고 저승으로 편안하게 천도하라는 씻김굿이 펼쳐진다. 신자는 흰 천을 감아 만든 매듭을 풀어내는 고풀이를 하고, 흰 천의 가운데를 찢어 길을 내는 길닦음을 행한다. 씻김굿은 말 그대로 이승의 모든 허물과 죄를 씻어내는 행위다. 무대를 가득 채운 커다란 흰 천이 쫙 갈라질 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

 

 

소리꾼과 악사들이 객석의 맨 앞에 앉아 굿판의 흥을 돋운다. 관객은 울다가 웃다가 어느새 어깨를 들썩인다. 객석에서 할미꽃이 피어난 느낌이다.

 

 

 

연극은 사람이 모여야 성립한다.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관객 중 하나라도 없으면 연극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서로에게 에너지와 활기를 주어, 나이 든 사람을 젊게 하고 우울한 사람을 흥겹게 한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모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 같아서 괜히 말을 걸고 싶어진다. 신자나 할매나 애기씨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과 관객은 모두 한통속이 된다. 토 달지 않고 한통속이 되는 느낌을 언제 가져봤던가. 이것이 연극의 힘이다. 이 연극의 힘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공연장을 찾는다. 현실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무대와 함께하기 위해 공연장에 온다. 이는 궁극적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여 치유된 자로 거듭나는 기회가 된다.

 

 

 

 

극단 삼산이수는 지방극단이라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숱한 장애물을 건너왔다. 오늘 <할미꽃 전설>에서 열성을 다하는 배우, 스태프 그리고 이에 동참한 관객을 보면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연극은 도시발달과 밀접하다고 한 것처럼, 김천에서 연극이 생기가 돌면 도시 전체가 생기가 돌 것이다. 김천이 흥하면 김천연극이 흥하고, 김천연극이 흥하면 김천이 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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